[그리스도요가]시간 vs 무시간에 대한 이해

무엇보다 먼저 너는 시간의 문제를 반드시 이해해야 해. 그것도 철저하게.
내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진실이야.
시간은 오직 인간의 마음 안에만 존재해. 실재 안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아.

그러나 이 세상 속에서 시계적인 시간은 필요하지.
날, 주, 달, 년 등. 이것은 약속을 하거나 지키는 것을 가능하게 할 뿐이야.
만일 이런 시간 체계가 없다면 기차나 배를 잡지도 못할 거야.
그런 시간을 우리는 앞으로 기계적 시간이라 부를 거야.

그런데 또 다른 종류의 시간이 존재하지.
과거, 미래, 기억, 상념, 믿음 등 네가 벗어나야만 할 마음의 시간이 그것이야.
이것을 우리는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게 될 거야.
자, 이제 네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시간이 바로 이 심리적 시간이야.
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불가능해.
왜냐하면 무시간적인 실재는 시간을 통해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야.

기억은 시간에 속해있어. 너의 생각들은 시간의 결과야. 너의 경험들 역시 시간의 결과야.
기억,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기억은 시간 속에서 네가 체험한 경험들의 결과야.
타인이 네게 했던 말들, 너의 관념들, 믿음들, 그리고 네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
이것이 바로 심리적 시간이야.

너는 진리를 원하고 있어. 하지만 진리는 시간의 결과가 아니야.
진리는 어떤 관념, 믿음, 생각, 또는 시간을 통해서는 결코 깨달을 수 없어.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어.
이런 것들이 덮고 있을 때 진리는 현현할 수 없어.
오로지 그런 것들이 벗겨지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만 

비로소 진리가 나타날 수 있어.

내가 칼림퐁에서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네게 주었던 첫 번째 가르침은 명상에 대한 것이었어.
오늘 아침, 나는 그 문제를 다시 다루려고 해.
왜냐하면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그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지.
올바른 명상은 필수적인 것이야.
하지만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처음 요가를 배울 때 너는 명상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생각들을 배제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어.
이제 나는, 이런 종류의 명상은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걸 네게 증명해 보이려고 해.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방법을 통해 모종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진리는 결과가 아니야. 결과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심적인 것일 뿐 진리가 아니야.
이해가 되니?”

“네, 이해됩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가 계속 말했다.
“올바른 명상이 무엇인지 알려면 우리는 사고의 전 과정을 반드시 이해해야 해.
너의 상념은 네가 알고 있는 것의 결과야.
너는 네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어.
그렇다면 너의 생각은 마음에 의해 제한돼 있어.
마음이 알고 있는 것에 제한돼 있지.
그러니 생각은 여전히 심적인 것 또는 하나의 결론이야.
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야. 이 점이 이해되니?”

“예, 이해됩니다.
진리는 어떤 결론이나 관념 또는 어떤 심적 구성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현재이고, 시간에 종속되지도 않고,
시간으로 현시될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전하는 것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사색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맞았어.” 그가 말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네가 네 자신을 이해하게 만드는 거야.
자아, 즉 ‘나’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진리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지.
실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나, 돈, 생각 등 마음에 속한 모든 것들이 끝나야만 해.

집중을 통해 명상을 할 때 상념들이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을 너는 알고 있어.
거기에는 항상 투쟁만이 존재하지.
그것은, 네가 참구해야 할 하나의 중심적 관념 또는 생각을 선택하였기 때문이야.
그러나 그것은 배제 행위야.
너는 하나의 중심 생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있지.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실재를 발견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해.
게다가 네 마음이 계속 정처 없이 떠돌고 있고,
네가 선택한 중심 생각에 너의 마음을 강제적으로 붙들어 두려는
끝없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 할 수 있을 거야.
지금 나는 집중이 마음에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다만 진리를 깨닫는 것과 관련해, 그것은 잘못된 과정이라는 거지.

그러므로 바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시작부터 바른 방법을 사용해야만 해.
왜냐하면 양자는 하나이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은가?”

“예.” 내가 말했다. “확실히 이해됩니다.”

“너는 나의 말을 통해 관념을 형성해서는 안 돼.” 그가 말했다.
“필수적인 것은 네가 마음의 모든 과정과
마음이 관념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거야.”

“자, 다시.” 그가 말했다.
“너는 왜 집중할 하나의 중심 생각을 선택하려 하는 거지?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 아닌가?
그것이 네가 한 생각에 계속 집중하는 이유야.
너는 어떤 결과를 바라고 있어. 하지만 진리는 어떤 결과가 아니야.
따라서 이 방법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야.

네 생각을 들여다보면
거기 네가 선택한 중심 생각과 꾸역꾸역 일어나는 다른 생각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너는 중심 생각에 계속 집중하면서 다른 모든 움직임들을 정복하려 했어.
그러나 한 번도 진리가 현시된 적은 없었어. 그렇지?
만약 네가 어떤 생각은 옳고 다른 생각은 그르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짓이야.
네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은 마음이 떠도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거야.
마음은 왜 여기저기 떠도는 것이지? 내게 말할 수 있겠니?”

“음,” 내가 대답했다.
“그것은 우리가 대부분의 생각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각들은 어떤 의미, 가치, 숨겨진 의미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잡초처럼 생각들이 계속 올라오는 것이죠.
우리가 그것들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들고 일어나죠.
그것은 마치 끓고 있는 냄비의 뚜껑을 누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 그가 말했다.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답은 아니야.
만일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비난 하지도 않고 편견 없이 지켜볼 수 있다면,
자유롭게 지켜보고 그것에 저항하지 않으면,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하지 않고 그것의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면
그 생각들은 다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너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은 결코 실재에 영향을 미칠 수 없어.
왜냐하면 실재는 마음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지.
이것을 이해할 때 너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
마음의 해방을 통해 그것은 고요해지게 되지.
바로 그 고요 속에 실재가 드러나게 돼.
왜냐하면 실재는 마음속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실재는 마음을 초월해 있어.
실재가 현현하려면 그 전에 반드시 마음이 고요해져야만 해.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생각들을 통제하거나, 억누르려 할 게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는 거야.
저항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어.
집중은 마음을 좁게 제한하는 행위야.
그것은 마음을 해방시키는 진리의 현현과정이 아니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중 행위를 명상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기고립의 과정일 뿐이야.
자기고립은 자기보호야.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두려움에 가득 찬 마음이 두려움 없는 실재에 이르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까?

만일 네가 너의 심적 창조물들을 조사하고 이해한다면
그것들이 너의 생각, 기억, 경험의 결과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므로 생각하는 자와 그의 생각들 사이에 분리는 결코 있을 수 없어.
후자는 전자의 산물이지.
사유자思惟者가 자신의 생각들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너는 자유를 발견하게 될 거야.

왜냐하면 그것들은 네 자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이지.
생각하는 자와 생각 사이의 투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돼.
그것은 너의 모든 심적 투쟁의 원인이야.
네가 이것을 자각하게 될 때 마음은 고요해지고,
생각하는 자와 생각 사이에 어떤 갈등도 사라지게 되지.
그리고 자기 인식인 사고의 전체 과정에 대한 이해가 존재하게 돼. 이해되니?”

“네.” 내가 대답했다.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을 때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걸 알겠어요.
왜냐하면 갈등이 사라지기 때문이죠. 마음은 기지旣知의 것 속에서만 살 수 있어요.
하지만 기지의 것은 결코 미지의 것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마음은 결코 미지자를 알 수 없다는 걸 이해하면,
마음은 중얼거리기를 그치게 되고 초월적인 것을 향해 열리게 되죠.
좁은 틀에 갇힌 마음은 보잘 것 없는 마음이고,
그런 마음이 신에 대해 가지는 관념 또한 보잘 것 없어요.
마음의 상태에 따라 제한되기 때문이죠.”

“지금 이 순간,” 그가 말했다.
“너의 마음이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지 않니?”

“네.” 내가 대답했다.
“전에는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고요함이 느껴져요.”

“음.” 그가 말했다.
“진리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야.
진리는 지금 이 순간이야. 그렇지 않다면 진리가 아니야.
마음이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고요해 질 때만 진리에 대한 자각이 가능해.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려고 하면 마음은 갈등상태에 놓이게 돼.
그러나 이해를 통해 마음이 고요해 지면 그때 진리가 현전하게 되지.

이제 생각하는 자와 생각, 경험하는 자와 경험의 이원성이 사라져.
그리고 이원성도 저항도 없는 경험만이 존재하지.
예수는 다른 표현으로 이렇게 말했어.
‘아버지는 언제나 내 안에 있다. 일을 하는 것은 그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너는 이렇게 고도로 추론하고, 말할 지도 몰라.
‘신은 본성상 무한하다. 그의 바깥에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를 제외하고 어떤 실질도 있을 수 없다. 그를 제외하고 어떤 생명도 없다.
그를 떠나서는 어떤 창조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무한한 존재일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추론 행위는 반드시 그쳐야만 해.
왜냐하면 마음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야.
마음은 여전히 공식화하고 있어.
비록 그것이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마음을 넘어서 있는 진리를 드러내지는 못해.
사고는 설령 가장 고차원적인 것일지라도 그쳐야만 해.
왜냐하면 사고는 결코 진리를 계시할 수 없기 때문이야.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 명상의 시작이야.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테크닉도, 어떤 특별한 자세도, 어떤 특별한 호흡법도 없어.
너 자신의 자아, 즉 마음을 알지 못하는 한
네가 무엇을 생각하든 거기에는 진정한 기초도 실재도 없어. 이해할 수 있겠니?”

“네.” 내가 말했다. “이제 분명히 알겠습니다.”

“너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부단한 자각이 필요해.
거기에는 어떤 강요도, 비난도, 합리화도 있어서는 안 돼.
단지 수동적인 깨어 있음만이 필요하지.
그런 깨어 있음 속에서 너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돼.
그러면 어떤 문제도 없어. 문제가 사라져 버리지.
왜냐하면 너의 마음이 바로 그 문제이기 때문이지.

실재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오직 혼란 속에 있는 인간의 마음만이 문제를 갖고 있을 뿐이지.
오로지 실재만이 존재해. 그 밖의 모든 것은 환영이야.
그 완벽한 평정 속에, 가슴과 마음의 완전한 정적 속에 실재가 존재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요가야.
그것은 아버지 유일자야. 그만이 유일한 실재이지.
그의 작용은 광대하고 광범위하고 완벽해.

“음,” 그가 말했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체계도 필요 없어.
왜냐하면 그것은 패턴을 만들기 때문이야.
하지만 진리는 어떤 패턴이 아니야.
명상을 시작함에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수단은 자유야.
그래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어.
이제 한 시간 동안 혼자 명상하며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을 지켜봐.
그러면 너는 네 자신을 알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