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율희 시인의 시

 

<가을 Ⅱ>

 

정원에 내어놓은 의자 위에 나뭇잎이 떨어져 있다.

라벨의 찌가느가 그 나뭇잎 위로 쏟아진다.

흔들리는 가을

찌가느는 하늘빛이다.

 

 

<굴뚝새가 한 말을 기억하니?>

굴뚝새가 한 말을 기억하니?

어릴 때 굴뚝새가 너에게

하던 말 기억 안 나니?

매일매일 너에게

속삭이던 말

다정하게 너하고 나누었던

그 말들이

기억나지 않니?

이 세상을 살았던

한 굴뚝새가

푸른 하늘 위에서

네게 했던 말

기억하고 있니?

굴뚝새 말로

기억하고 있니?

 

 

<나무를 추억하다>

봄도 아니고 겨울

벌거벗은 몸 그대로

한 나무를 추억한다.

살아서 삶을 노래할 수 있다면

나무에 박힌 수없이 많은 그

못들을 먼저 빼줄 것이다.

인연으로 덜커덩거리며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땐

못을 박았다.

네 가슴에 네 머리에

그리고 네 심장에.

오늘, 응고된 눈물로

그 못들을 빼내며 나는

내 가슴에 못을 박는다.

선혈 솟구쳐 울부짖는

내 가슴을 헤집고 나는 깊디깊은

대못 하나

내 심장에 박는다.

바람소리 찬 겨울

나는 한 나무를 추억하고

그 추억으로 그 나무를 사랑한다.

자작나무

끝은 언제나 아름답다.

너를 추억하는,

너의 날개를 추억하고

너의 입술을 추억하는

아! 내 추억의 끝은

기다림

겁과 겁을 뛰어넘는

아득한 기다림

자작나무

살아서 삶을 노래할 수 있다면

폭우가 온다 한들 그 강

건너지 못할까?

자작나무

기다림 끝에 너를 보는 날

너의 눈을 보는 날

내 추억도 끝나고

그 대못도 빠질텐데

벌거벗음이 부끄러운

오늘,

너를 추억하는 시간 속으로 나뭇잎

하나 떨어진다.

그 기도.

한 나무를 추억한다.

 

 

<멀리 있는 너에게>

눈이 내린 날

하루 종일 내린 날

멀리 있는 너에게

나는 눈이 되어 나를

너에게 보낸다.

세상이 눈으로 덮여버린 날

나는 눈이 되어 나를

너에게 보낸다.

눈 속의 나를 알아볼까?

내가 눈이 된 걸 알까?

너는 창가에 서서

나무 위에 앉은 나를

풀밭 위에 앉은 나를

몰라볼지도 몰라.

눈이 내린 날

하루 종일 내린 날

눈이 된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지만

너는 나를 단지 눈으로만 알 뿐,

아! 내가 눈꽃으로 숨쉬고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고

너는 모르고……

눈이 내린 날

내가 눈새가 된 걸 너는

모르고…….

 

<바다 2>

흰 고양이처럼 웅크린 나는

그대의 잠이다.

현기증으로 울렁거려도

나는 그대의 특별한 잠이다.

내가 꾸는 꿈은 그대의

사소한 일상에 푸른,

아주 짙푸른 선 하나

긋는 것이다.

물구나무서기로 다가오는 하늘

편안하고 편안한 목 껴안으며

흰 털 북슬북슬한 그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대의 특별한 잠인 나는

스스로 그대가 되고

그대를 통해

수없이 많은 무지개 빛 물방울이

된다.   

물방울 고양이

물방울 현기증

그대는 내 바다다.

 

 

<바다 3>

언제나 초록 모자를 쓰고

너는 내게 달려 왔다. 

천길 만길 흩어진 내 머리카락

태양 아래로 모으고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는 내 손을

네가 잡아 주었다.

몇 천년의 시간을 잠들었다 해도

너는 기다리고 기다려 

흙으로, 바람으로

내게 돌아왔다.

언제나 초록모자를 쓰고

내게 달려왔다.

영원한 것은 가슴에 있고

푸른 새는 오늘을 노래한다.

눈부심의 기적

늘 새로운 너의 초록 모자

하늘에는 금빛 뱀이 펄럭거린다.

천년도 더 된

만년도 더 된.

 

눈부심의 기적

물구나무서기의 기적

 

 

<바다-도마뱀>  

밀크티처럼 달콤해요

우울한 한낮의 비를 기타로 연주하며

바다에 쏟아지는 은빛 물고기들을

쏴아쏴아 펄떡거리게 하는

코타키나발루의 하늘은.

그 하늘에서 눈부신 도마뱀 한 마리

수 천 개의 꼬리 달고

색동저고리 몸통 흔들며

너울너울 내려왔지요.

금빛 동아줄 타고 내려왔지요.

야자수 그네 타고

검은 눈 반짝이며

초록단지 가슴에 품은 채, 나에게

왔지요.

먼 길, 접어두었던

그대의 마음, 도마뱀으로 온 것을

나 이내 알았지요.

수 천 개의 꼬리, 그대의 눈이 되고

그대의 손이 되는 것을

이내 알았지요.

내내 비오고 내내 바람불어도

해 넘어, 달 넘어 올 것을 알아요.

하필 도마뱀으로 온 그대 

그대의 초록단지, 깊은 숲이 될 때까지

코타키나발루의 시간으로 남은 그대

큰 발가락으로 남은 그대

 

 

<바다-코타키나발루>     

 

돌고 돌아서 먼 바다 앞에 섰네.

해는 떨어지고

이국의 낯선 바다는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하다.

삶이란 게 건너고 또 건너는 거라

나는 비행기 타고 하늘을 건너

마을을 건너고 산을 건너,

신 같은 바다를 건너

코타키나발루, 바람 아래 땅에서

몇 천 년 전 떠나온 나를 다시

만난다.  

사람들을 건너

그저 허허로운 바람으로 바다에 누워

빛 없어진 세상을 바라본다.

어둠이 시작되나 그 소맷자락에서는

새들의 날개 짓이 출렁거리고

오히려 세상은 태연하다.

힘겹게 건너고 건넌 바다

내 날개는 보이지 않는데  

다시 건너야 할 너무 높은 바다

‘나’ 앞에 마주서서

돌아가야 할 너에게 파도로 편지를 쓴다.

코타키나발루의 하늘은 해 없이도

뜨겁고 그 바다는 너무 깊어

내 이마엔 푸릇푸릇 푸른 날개가 돋아나고

아! 시간이 흐른 후

그 날개로 편지를 쓰나니

돌아가야 할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 바다는 바로 그대였습니다.”

 

 

 

슬리퍼 신고 뛰어가다

문득 고개 돌렸다.

수선화 

뜰 한 쪽 부둥켜 앉은 채

피어있는 

사랑하지도 않고 주억거리는

궁시렁대는

슬리퍼 벗어던지고

화들짝 맞이하는

 

 

<브로콜리>

초록색 푸들이

비누 거품 놀이하듯

몽글몽글

수 만개로 피어오르는

물방울

비누방울 

유리방울

초록색 푸들이

대가리 풀어 흔들며

신나게 장난치고 있는

둥근 산

둥근 산

진짜진짜

하늘 높이 떠오르는

커다란 풍선

팡!

 

 

<아버지의 뜰>

아버지의 뜰에는

늘 해바라기뿐이었다.

키 커다란 눈 큰 해바라기

뜨지 않는 해를 기다리기만 하다가

저녁이면 그 큰 얼굴 떨어뜨리고

시름에 차는.

어느 여름날,

기다려도 기다려도 해는 뜨지 않고

비가 하늘과 땅에 가득하던 날

해바라기는 일어나지 못했네.

바다가 뜰에 넘치고 넘치도록

아버지의 해바라기

바다에 휩쓸려 바다가 될 때까지

먼 훗날 사람들은 말하겠지.

아버지의 뜰에는 언제나

해바라기 가득했다고

그런데 어느 여름날

그 해바라기 바다가 되어

바다로 가버렸다고

해 찾으러 가버렸다고

그러나 사람들은 모를 거야.

해바라기 속에 빛나던 해

바다 속에 숨어있는 해

그 해

아버지의 벗기 싫은 구두였다는 것을…

 

 

 

<아버지의 가을>

아버지는 귀뚜라미 한 마리

기르신다.

몇 년의 가을을 한 방에서

그 귀뚜라미 기르신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귀뚜라미의 더듬이에 걸어 놓고

그 삶을 기르신다.

수 십 년의 세월을

귀뚜라미가 울고

비어있는 시간의 공간을

귀뚜라미가 내닫는다.

아버지는 귀뚜라미 한 마리

기르셨다.

어두운 막막함을 귀뚜라미의

각질 속에 감추고

낮은 휘파람을 귀뚜라미에게

들려 주셨다.

그 삶이 귀뚜라미 되어

아버지 되어

강이 되어

흐른다.

 

 

<숲, 거인을 만나다>

 

거인이었다.

내가 솔숲에서 만난 그 바람은.

안개 가득한 빗속에서

아무 말 없이 갑자기 나타난 그

그리움은.

그가 내게 건넨 것은

시간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월

그의 푸른 손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나는 그 시간을 받아들고

솔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침묵이 거인의 맑은 눈 안에서

내게 말을 걸고

나는 또 침묵으로 거인에게

대답했다.

 

수많은 별들이

비밀의 바늘들처럼

거인의 등 뒤로 내려앉았다.

솔숲이 몇 번 우르르 울었다.

나는 거인의 등 뒤에 서서

하늘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내 손위에 있던 시간

강물 되고 바다 되어

출렁거리는데

사라지는 그 문 앞에

거인이 서있었다.

백년, 천년의 세월로

이 세상의 비밀을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거인이 잠깐 웃었다.

나무 같다고 돌 같다고 새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비가 쏟아졌다.

솔숲이 그 얼굴을 들어 비를 맞았다.

수많은 별들이 눈을 감은 채

솔숲으로 떨어졌다.

솔숲이 다시 우르르 우르르

큰 눈으로 울었다.

거인이었다.

내가 그 때 솔숲에서 보았던 그 침묵은.

맨 발바닥에 맨 손으로

그렇게 간절히 염원했던

그 눈빛은

 

<아침 1>

 

빛이 깨어나니

만물이 바쁘다.

원래 청정했던 마음

세상 속 연못에 깊이

잠기었더니

아침 새소리에 문득

비 소리 가득하고

천지에 퍼덕이는 날개 소리

홀로 고요하다

 

 

<아침 2>

 

소나무 

빛을 받아 반짝이는데

감겼던 눈 다시 뜨고

강물 위에 앉아

흘러가는 세상과

흘러가는 시간 속

무한해진 마음을 따르니

뜻밖에 사과나무

한 그루

마당에 가득하네

 

 

<아침 3>

 

그립다는 건

내가 아직 나를 비우지

못했음이라 

저 세상 밖과

이 세상 안이

다 내 마음 안에 있어

찬란한 아침에도

등불을 환히 켜고

그대를 본다.

지금은 

낮의 시간, 차마 그대를

마주하지 못하고

그대의 눈빛 조용히 내려놓으니

일순간 이는 바람소리

꽃잎으로 아스라이

사라지다. 

 

 

<아프리카-그리움-1>

 

말을 타러 가자

소를 타러 가자

쥐를 타러 가자

추위가 닥쳐오리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과

기억해야 할 일들

기억나는 일들을 거느리고

의심하지 않으며

바위 속으로…

폭풍으로 오는 잠, 멀리

싸늘한 침엽수

빛에 묶인 땅-그 위로

쥐를 타러 가자

뿔 꺾인 소를 타러 가자

꼬리 긴 말을 타러 가자

추위가 닥쳐오리니

낮 시간-낮 시간

아프리카를 잊으며

 

 

<오르페우스의 꽃> 

 

1.

내 노래는 길고

내 노래는 달콤하여

긴 세월, 그대가 나를 잊어도

숲이 아침이면 새롭게 빛나듯이

그렇게 그대 나를 찾아오리라.

2.

아폴론의 리라

내가 타던 리라

한때 곰들과 사슴, 늑대들까지

나의 노래를 듣고

바위와 물푸레나무 상수리나무까지

나의 노래를 들었지만 

지금은 천년만년 세월이 흘러

내 노래가 간 곳을 나도 몰라

3.

독사가 그대의 영혼을 빼앗은 후

내 삶은 의미 없어.

마치 겨울들판처럼 싸늘해져

지옥도 내 심장을 덥힐 수 없었지.

한순간에 늙은이가 되어버린 듯

그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의 영혼은 무겁고 슬픔은 강을 이루어

그대를 볼 수 없고

그대 목소리 들을 수 없어

에우리디케, 그대를 그토록 갈망하였건만.

 

인내의 천사는 끝끝내 나를 돌보지 않아 

돌아보지 말아야 할 그대를 돌아본 죄로

영원히 그대를 잃고 말았네.

4.

아! 사랑이여

삶이여, 죽음이여!

그대가 없는 세상에 바람만 불고

내 탄식은 하늘을 물들이고 바다를 가르네

 

에우리디케,

나 한낱

강물이면 어떠리

모래알이면 어떠리

그대 이름 부르고 불러서

벙어리 되면 어떠리

침묵이 내 살을 찢고

내 심장을 찢는다 해도

에우리디케,

오직 그대만의 노래이고 싶은 것을.

오직 그대만의 영혼이고 싶은 것을.

5.

기쁨도 즐거움도 나의 것이 아니니

사랑하는 그대여

나, 그대를 위한 꽃으로 태어나

그대의 머리 위에 금빛 새벽빛을 비추고

그대의 발아래 노을로 지려하네.

 

시간이 나를 잘게 부수어

내가 안개꽃으로 피어나면

그대 나를 위해

강으로 와서

발을 물에 적시고

영원히 끝이 없을 내 노래를 들어주오.

죽어서도 살아있을 내 눈을 바라봐주오.

에우리디케, 내 사랑

오르페우스의 꽃이여.

  

오르페우스의 꽃이여.

 

<의자와 전쟁>

전쟁은 따뜻하다.

의자도 따뜻하다.

꿈꾸는 자, 숨쉬는 자

잠자는 자, 게으른 자

모두 그 안에서 운다

전쟁은 조용하다.

의자도 조용하다.

두려움은 모두를 조용하게 만든다.

조—요—o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다.

푸른 창 앞으로 빛들이 날개를 치며

날아든다.

전쟁은 텔레비전 속에서 왕왕거리고

나는 의자 안에서 편안하다.

전쟁은 너무 멀고

의자는 너무 가깝다.

문득 툭 치는 의자의 주먹

의자의 기억

“일어나란 말이야!

전쟁하러 가야 돼.”

전쟁은 일상이 되고 의자는 특수상황이 된다.

“일어나란 말이야!”

“일어나란 말이야-”

 

<이제 나무는 겨울로 가고>

 김 율 희

 

맨발을 닦고 닦아도

흙이 묻는다.

왜 그런가?

나는 겨울바람 찬 나무 밑에 앉아

그 처연한 얼굴을 바라보며 묻는다.

노을이 땅에 걸리고

하늘이 숯 검댕이 같은 얼굴로 나무를 감싸 안았다.

나무는 그냥 그대로 여전히 처연하다.

내 뒤를 바라본다.

문득 따라오는 지난여름의 잊어버렸던 소리

하나가 나무 위에 커다랗게 

걸린다.

아버지.

지난여름은 잔인하였다.

숯 검댕이 같은 얼굴 아래

나무는,

나뭇잎 하나 없이

아아! 황금빛으로 빛나던 나뭇잎 하나 없이

맨몸으로 세상에 온전히 자유롭다.

맨몸으로 길 떠나던 우리 아버지

아아! 황금빛으로 빛나던 햇살 하나 없이

하얗게, 그냥 하얗게 길 떠나신 우리

아버지.

이제 나무는 겨울로 가고

다시 그 외로움으로 세상에

홀로 선다.

나는 아버지 긴 이름을 부르며

겨울 속으로 영원히 떠나버린

내 마음 속의 푸른 나무를 기억한다.

맨발을 닦고 닦아도

흙이 묻는다.

왜 그런가?

겨울이 된 나무가 내게 물었다.

 

 

<푸른 옷소매>

김율희

요즘은 밤이 참 짧다.

너를 기억하는 매일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매일 너의 자전거가 절뚝거리며

내 눈 속으로 깊이 걸어

들어오는 걸 햇빛 속에 무심하게

걸어 들어오는 걸

나는 기다리기 때문이다.

사랑해서 

심장도 아닌 발이 시리다며

너는 신발도 신지 않고

껴 신어야 할 양말 한 켤레 마다하고

그냥 맨발로 떠났다.

매일 밤 그 맨발에 나는 죽도록

머리를 부딪는다.

푸른 옷소매

사랑해서 내가 네가 되는 것은

왜 이리 힘든가

사랑해서 내가 내가 되는 것은 왜

이리 더 힘든가 

푸른 옷소매

매일 아침, 내 안에 앉아 있는

양말 한 짝, 신발 한 짝

자전거의 바퀴 소리

시끄러운 어느 아침

의자는 비어 있고

햇빛은 푸르다.

그 푸른 옷소매